[아시아경제 베이징 박선미 특파원, 오현길 기자]중국에서 외환위기 후 처음으로 대형 국유기업이 달러화 표시 채권에 대한 이자를 못 갚아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는 사례가 나왔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로 민영기업 뿐 아니라 국유기업도 디폴트에 빠지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어 중국에 어렵게 진출해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 은행들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20여년만에 中 국유기업 역외시장서 디폴트=26일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에 따르면 중국 칭하이(靑海)성의 대표적인 국유기업 칭하이주정부투자그룹(QPIG)가 지난 22일 만기였던 3억달러(약 3300억원) 규모 역외 달러화 표시 채권에 대한 이자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에 빠졌다. 이 국유기업은 전날까지 갚아야 하는 1년 만기 2000만위안(약 33억원) 규모 부채도 상환에 실패했다.

중국 국유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역외 시장에서 디폴트에 빠진 것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광둥국제신탁투자(GITIC)가 50억달러 규모 디폴트에 빠져 중국 경제를 떠들석하게 했다. 이후 비슷한 사례가 나올 수 있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정부가 구원투수로 등장해 급한 불을 껐다.

QPIG의 디폴트 사례는 중국 경제가 미중 무역전쟁 및 디레버리징(부채축소) 캠페인을 겪으면서 빠르게 하강하고 있는 가운데 나와 더욱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다. 더군다나 QPIG가 지난해 6월 중국 내 신용평가회사로부터 부여 받은 신용등급은 디폴트 위험이 낮고 투자해도 안전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AA'등급이다.

과거에는 대형 국유기업이 디폴트에 빠질 위기에 처하면 중국 정부가 나서서 구제해 줬지만, QPIG가 예상을 깨고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앞으로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디폴트 기업들이 더 많아지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투자자가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폴트 기업들이 늘고 있는 중국 금융시장의 위기상황을 인식한 중국 지도부의 경고도 나오고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지난 22일 리커창 총리 등 25명의 정치국위원 전원을 소집해 "금융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고 금융 안정은 국가 안정에 직결되는 요소"라고 강조하며 "금융 리스크를 방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中 디폴트 급증에 韓 은행권도 긴장=은행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 유동성 위기로 디폴트 우려를 낳았던 중국의 대형 민영 투자기업 중국민생투자(中國民生投資)와 계열사에 하나, 신한, 우리 등 한국 은행권의 자금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단 보유 부동산 매각으로 디폴트 위기를 피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중국민생투자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가능성도 있어 한국 은행들도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민생투자에 또 다시 문제가 불거질 경우 가장 타격이 큰 곳은 하나금융이다. 하나금융은 2015년 4월 중국민생투자와 합작을 통해 중민국제융자리스를 설립했고 현재 계열사로 있는 중국국제융자리스 지분 25%(1320억원)를 보유 중이다. 다음해인 2016년에는 중국민생투자의 자회사인 재보험사 중민국제(CMIH)에 2억달러(약 2200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한 지분투자도 진행했다.

신한과 우리는 중국민생투자와 지분 투자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열사에 대출을 해주고 있어 모회사인 중국민생투자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출 규모가 작아 그나마 안심이라고는 하지만 중국민생투자 위기가 또 다시 이슈가 될 경우 중국 사업이 위축되는 적잖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 은행 관계자는 "가뜩이나 한국 은행들의 중국 사업이 힘든 상황에서 중국 기업들의 연쇄 디폴트는 더욱 업계 분위기를 위축시키고 있다"며 "올해는 작년보다 더욱 중국사업을 신중하게 진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은행업계 관계자는 "중국민생투자가 보유 부동산을 팔아 급한 불은 껐지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중국 사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또 다시 느꼈을 것"이라며 "국내은행 중국법인들은 중국 기업 정보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국유기업이거나 한국과 관련이 있는 기업 투자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민생투자 계열사에 한국 은행들이 줄줄이 대출을 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은행권에 민영기업 대출을 해줄 것을 압박하고 있지만 중국 기업들의 디폴트가 확산되고 있는 지금의 분위기상 한국 은행들은 이를 따르기 힘든 상황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민영,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는게 현재 중국 정부의 기본 입장이지만, 리스크가 워낙 커 한국 은행들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미중 무역전쟁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 후 중국 은행권의 움직임을 확인한 후 분위기를 따라가도 늦지 않다고 본다. 올해는 소극적 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재생에너지, 부동산, 보건 항공 등에 투자하는 중국민생투자는 지난달 29일로 만기가 도래한 채권 30억위안의 원리금을 제때 상환하지 못했다. 상하이에 보유한 땅을 매각해 원리금 상환일이 십 여일 지난 이달 12일에야 비로소 30억위안을 상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은 추가 디폴트 우려를 불안해하는 눈치다.

중국 안에서는 '쉬쉬' 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디폴트 확산은 현재 위험 수준이라는 게 외부의 시각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중국에서 2019년 들어 지금까지 발생한 채무불이행은 사모 4건, 공모 12건을 포함해 120억위안(약 2조원)에 달한다. 올해 말까지 10개월 동안 만기가 찾아오는 채권은 4조8000억위안(약 802조2000억원)에 이른다.

베이징 박선미 특파원 psm82@asiae.co.kr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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