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원 이상 주문 1년 새 63% 감소… 국내 기업 실적 둔화가 주요 원인


"배당 많이 주는 좋은 해외 주식들이 널렸는데,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 아쉽습니다."

일산에 사는 50대 수퍼 개미 A씨는 수십년 투자해 왔던 국내 주식들을 팔아서 해외 주식 40여개로 갈아타고 있다. 배당 수익률이 최대 12%까지 높아지는 안정적인 고배당 종목들만 골라서 계좌에 담고 있는데, 목 좋은 빌딩의 월세 통장처럼 만드는 것이 목표다. A씨는 "국내 주식 거래 때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대주주 범위가 2021년에 3억원까지 낮아지는데, 해외 주식 매매로 양도세 내는 것과 거의 차별화되지 않는다"면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다는 괜한 의심을 사지 않아도 되고, 거액 주식 거래한다는 이유로 세무 조사 대상이 될 일도 없으니 너무 편하다"고 말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개미(소액 주식 투자자)들의 로망인 수퍼 개미들의 존재감이 옅어지고 있다. 수퍼 개미란 주식시장에서 거액 매매를 하는 개인 투자자를 일컫는다. 1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1억원 이상의 대량 주문 건수는 45만건으로 작년 1월과 비교하면 63% 줄어들었다. 이형일 KB증권 전무는 "주식 투자는 결국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을 보유하는 것인데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같은 메가 트렌드를 선도하는 기업들은 해외시장에 포진해 있다"면서 "거액 자산가들은 국내 주식 일변도에서 벗어나 해외 주식으로 판을 넓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위대한 기업이 없다"…떠나는 수퍼 개미들

최근 수퍼 개미들의 국내 주식시장 자금 이탈은 한국 기업들의 실적 둔화가 대표적 이유로 꼽힌다. 돈 냄새를 잘 맡는 수퍼 개미들이 본능적으로 큰돈이 벌릴 곳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코스피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8% 줄어들 전망이다. 김기주 KPI투자자문 대표는 "수퍼 개미들은 옛 삼성전자 같은 성장 기업이나 고(故) 이병철·정주영 회장 같은 탁월한 기업인을 찾지만 국내엔 재벌 3~4세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한국에는 투자해서 안전하게 돈을 벌 만한, 즉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극복해낼 수 있는 위대한 기업들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김태석 가치투자연구소 대표도 "좋은 회사가 있다면 국내와 해외시장을 가릴 이유가 없지 않으냐"면서 "국내 기업들의 낮은 자본 효율성과 짠물 배당 등으로 한국 증시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해외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주식 결제대금은 326억달러(약 37조원)로 전년보다 43% 증가했다. 역대 최대치다.

◇해외 주식 투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

간편해진 해외 주식 투자 인프라도 수퍼 개미들의 머니무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전엔 해외 주식을 사려면 증권사 직원을 거쳐야 하고 투자 금액도 제한받는 등 절차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만 갖고 있으면 저 멀리 중남미 주식까지 쉽게 투자할 수 있다. 김현준 더퍼블릭투자자문 대표는 "해외 주식은 아직 낯설다 보니 자산을 분산할 수 있는 거액 자산가들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라며 "글로벌 투자를 하면 위험을 수동적으로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인 투자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령 중국 사드발 위기가 터졌을 때 한국 화장품 주식 매도에 급급하기보다는 일본 면세점이나 태국 공항 주식 등 수혜주에 투자하는 식이다.

물론 해외 주식 직접투자는 투자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고, 매매 차익에도 세금을 내야 하는 등 국내 투자보다 불리한 점이 분명 있다. 또 달러나 엔화 같은 외화로 투자하기 때문에 환율 변동 위험에도 노출된다. 수퍼 개미의 자금 이동은 국내 증시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버핏식 가치 투자로 유명한 재야의 고수 김철광씨는 "투자 안목이 있는 수퍼 개미 자금이 한국을 떠나면 결국 한국 증시는 성장하지 못하고 변두리 시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아진다"면서 "저평가 기업은 외면받아 더 저평가받고,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경은 기자 div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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